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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 사람

(07.23.2016)


우연히 아들의 수학 문제집을 훑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분수의 연산에 대해서 배우고 있더군요. 오랜만에 보는 숫자들의 춤사위는 문득 저로 하여금 어린 시절 읽었던 숫자 ‘영’(zero)에 대한 글 한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장편 소설에 나오는 ‘마들렌’ (조개 모양으로 생긴 프랑스 로렌 지역의 전통 케이크)이 주인공의 생각을 과거로 이끌어 간 것처럼 말이죠.


‘0’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너무나 많이 보는 숫자여서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 많지 않을거라 생각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거잖아?’ ‘하찮은 것’ 라는 생각 정도이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0’이라는 숫자는 인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기원전 2세기 중국이나 마야(Maya) 문명에도 무(無)의 개념이 있긴 했지만, 그 모양이 숫자 0과는 달리 ‘점’이나 ‘나선형 쐐기’모양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세기경에 페르시아인들이 인도인으로부터 0의 개념을 모방했고, 또 몇 세기 후에 아라비아인들이 페르시안들로부터 0의 개념을 가져다 쓰기 시작했습니다.

서방 세계에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에 의해 “zefiro”라는 이름의 숫자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말은 아바리아어, “ṣifr”에서 가져온 것인데, ‘텅 빈’(empty)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0의 개념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 통념이나 관습, 법률 등의 중심이었던 교회는 0이 너무나 많은 기존의 개념들을 뒤집어 엎는다고 해서 “악마의 숫자”로 정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떤 수를 곱하든 0은 그 결과를 무(無)로 만들어 버리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합니다. 0은 그 자체로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숫자 뒤에 붙으면 그 수를 열 배로 만들어 버립니다. 두개가 붙으면 백배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처럼 어떤 수의 오른쪽으로 가면 그 숫자에 어마어마한 힘을 주지만, 왼쪽에 붙으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02 = 2’의 등식에서 보는 것처럼 말이죠. 0은 어떤 숫자에 아무리 더하거나 빼도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곱하게 되면 아무리 큰 숫자도 0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힘을 잃어버리고 0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셈이지요. 이 뿐만 아닙니다.

‘음수’(陰數)라는 수의 체계가 있습니다. 앞에 마이너스 기호 (-)가 붙은 숫자이지요. 이 기호가 붙으면, 신기하게도, 숫자가 크면 클수록 실제로는 작아집니다. 예를 들어, ‘-2’보다 ‘-14’가 더 작지요. 0은 이 양수(兩數)와 음수(陰數)를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즉, 수의 개념을 뒤집어 버리는 경계선이자, 완전히 새로운 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셈입니다. 0은 참으로 신비한 숫자입니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그 짧은 글과 잠깐 구글링해 본 숫자 0의 개념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각의 실타래를 키워봅니다. ‘앞에’ 서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숫자 ‘뒤에’ 조용히 붙어서 앞선 숫자의 힘을 키워주는 0, 아무리 큰 숫자라도 곱셈을 통해서 겸손하게 만드는 0, 작게 작게 더 낮추면 마침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숫자 0처럼, 묵묵히 다른 사람의 뒤에서 상대방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 자신의 연약한 모습으로써 오히려 강하다고 하는 자랑을 겸손하게 만드는 사람,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는 사람. 그런 ‘영(0)’한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아들 녀석의 수학 문제집 한 페이지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아침입니다.


신자겸 목사

하나로교회담임

972-488-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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