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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단상> 십자가의 중심성 (1)

MAR 26, 2018


몇년 전, 제가 섬기던 교회가 새 이름을 바꾸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부르기 쉽고, 기억에 남고, 좋은 뜻을 담은 이름을 정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교회 이름을 “저주받은 교회” “Doomed Church”라는 식으로 짓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저주받은 이미지를 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지금도 교회 건물에는 안팎으로 어김없이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저주받은 흉물이 교회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사실, 십자가 외에도 초대교회에서 자주 쓴 상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다들 잘 아시는 것들인데요,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을 기념하는 물고기, 성령강림을 상징하는 비둘기, 공작 (불멸의 상징인듯), 그리고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생선 같은 경우 문자적인 일치를 제외하고는 예수와 별 상관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 주후 2세기, 즉 예수께서 죽으신지 약 100여년 이상이 흐르면서 서서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십자가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고대로부터 혐오의 대명사였지, 앰블램으로 삼을 만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페르시아나 앗수르 제국 등 고대로부터 사용되었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어온 것이 기원전 100년 전, 로마에서는 노예들을 벌주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방법은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묶어놓고 고통을 주는 체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 후부터 식민지인들에 대한 처형 방법으로 로마는 이 십자가형을 채택했습니다. 


이 끔찍한 극형을 사람들은 혐오했습니다. 예를 들어, 씨쎄로(Cicero)는 고참 원로원 의원인 가이우스 라비리우스가 1급 살인죄로 고소당했을 때, 그를 변호해서 승소한 적이 있는데, 이 변호에서 그는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의에게 적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 귀, 생각에서까지도 멀리 사라져야 한다’고 항변했습니다. 이토록 저주스런 십자가를 기독교들은 왜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 그토록 입에 오르내리는 것일까요?


첫째,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당신 스스로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십자가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예수의 수난 예고, 즉 “자신이 십자가 형틀에서 고난 당하고 죽을 것”을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군중들이 당신을 왕(다윗같은 메시아)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이 있고 난 후였습니다. 두번째는 갈릴리 지역을 몰래 지나가실 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막9:31, 눅9:51).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기 일주일 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명확하게 다시 한번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막10장). 이 세번의 수난 예고, 즉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마다 예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후세의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시되 당신의 가르침이나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 등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죽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제자들과 생전에 나누신 마지막 식사였던 최후의 만찬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떡(‘마짜’라고 하는 유대인의 주식 빵)과 포도주(음료)를 나눠주시면서 그것이 각각, 당신이 죽을 때 찢겨지게 될 살과 흘리게 될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식사를 당신이 죽고 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당신을 기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로 영원히 기억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복음 전파와 기독교 교리 체계를 세운 선구자였던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내가 …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2절).


- 다음 편에 계속 -


신자겸 목사

하나로교회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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