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자꾸 전기세가 나요.”
아침에 등교 준비를 하던 딸 아이가 스웨터를 입으며 말합니다.
“뭐라고?”
“전기세가 난다구요.”
스웨터를 잡아 당기면서 재차 말하는 걸 보고는 그제서야 ‘전기세’가 ‘정전기’를 말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이제 네 살박이 민하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자신만의 단어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민하의 단어장엔 이런 발음의 단어도 있습니다.
“아빠, 페이버릿 컬러(favorite color)는 뭐에요?”
“아빤 그린이 좋아.”
“난 넬로! (옐로우)”
이렇게 하교길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한번 파안대소를 자아내었던 적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조건문의 표현인 “만약 …하면?”라는 표현도 “만약 …하넘?”이라고 발음합니다.
자기 의사표현에 별 무리가 없는 아이에게서 이런 발음들이 나올 때, 약간은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민하의 어리숙한(?) 발음을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에 ‘옐로우’라는 발음을 반복해서 따라 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나 : “민하야, 따라 해 봐. 옐”
민하 : “옐”
나 : “로”
민하 : “로”
나 : “우”
민하 : “우”
나 : “자, 이번엔 한번에 해봐. 옐로우”
민하 : “넬로”
한 자, 한 자는 곧잘 따라 하다가도 한 단어로 이어서 말하면 어김없이 민하의 입에선 “넬로”가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저의 어줍잖은 발음교정사건이 있고 난 후 한동안 민하는 노란색을 말하길 피하는 게 아닙니까.
그 일로 인해 저는 고치려 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것이 먼저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보니 아이의 발음은 이상하기 보단 오히려 귀엽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아내와 함께 키득거리며 민하만의 단어장을 즐기기도 합니다.
“민하야, 바나나는 무슨 색이야?”
“넬로!”
“해바라기꽃은 무슨 색”
“넬로!”
모시조개 같은 입술로 이 단어, 저 단어를 웃기는 발음으로 말하는 게 너무 이쁘게 보였습니다. 그 귀여운 발음들을 그냥 흘려 보내기가 싫어서 스마트폰 녹음기로 녹음까지 해두었습니다. 먼 훗날, 조그마한 민하가 그리워 질때면 들을 수 있도록 말이죠.
생각건대, 딸 아이의 어리숙한 발음의 단어들은 정보전달의 도구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부녀지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사 전달 기능은 떨어지지만, 아이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기 위해 한 번 두 번 더 묻고 속으로 생각하는 과정 가운데 아이의 의도와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언어의 ‘관계적 기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기도를 흔히들,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말을 거는 이 기도의 목적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빠, 이게 필요해요.’ ‘아빠, 좀 도와주세요.’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고, 간절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성취보다,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대화 가운데서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기 기만 없이 깨달아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그의 저서 ‘최고의 대화’에서 말하길, “기도할 때 우리는 열망하는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데 목적을 둬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고 했습니다.
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생각인데, 절대 공감되는 묵상입니다.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닌 관계 형성을 위한 기도는 비록 어린아이의 발음처럼 어눌하다 할지라도 듣는 분의 마음 한자락을 거머쥐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저희 딸은 스웨터를 입을 때마다 ‘전기세’를 냅니다.
들을 때마다 웃긴 이 발음은 저를 깔깔거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마음 저 밑바닥에선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딸을 향한 정전기 불꽃과도 같은 사랑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신자겸 목사
하나로교회 담임 972-488-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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