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8, 2017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지 1주년이 되던 어느 주일 미사에서 플린(Flynn) 신부는 설교에서 말하길, “우리는 작년 대통령을 잃는 절망에 사로잡혔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때 우리 서로가 고통 속에서 느꼈던 연대감은 바로 그 절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 200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존 패트릭 섄리(John P. Shanley)의 희곡 ‘Doubt: A Parable’을 각색한 영화 ‘다우트’의 첫 장면입니다.
저는 이 첫 장면에서 더 이상 영화를 시청을 계속하지 못하고 그 말을 계속 곱씹었습니다. 누구나 즐거운 일을 함께 한 사람보다 고통의 순간을 함께 나눈 사람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이 저의 뇌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말하길, 불행한 시기에 사람들은 연대의식을 느끼며 단결하지만, 행복한 시기엔 분열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힘을 합해 승리하는 순간, 저마다 자기가 공동의 성공에 가장 의미심장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공적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친구와의 우정을 건강하게 지속하려면 자기들의 성공에 열을 올려 이야기하기 보다는 실패한 일을 자주 이야기해 주는 게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고통에는 이런 숨겨진 힘이 있습니다.
“공감”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중에 “sympathie”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soum pathein”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감은 단순히, ‘이해한다’는 뜻을 너머서 고통까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어의 “동정(compassion)”이라는 말 또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라틴어, “cum patoir”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초대교회 시대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끈끈하게 서로 영적 유대관계를 이어 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을 본받아 저마다, 고통스럽지만, 순교자적인 삶을 추구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연대의식은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당하신 주님의 고난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이처럼, 끈끈한 연대의식은 고난 가운데 있는 동료들을 위로하는 데서 더 생겨납니다.
함께 객지에서 이방인으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마음에 요긴한 생각이 바로 연대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연말연시에만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되어선 안 되겠지만, 다른 어떤 때보다 더 고개를 자주 돌려 주위와 함께 마음을 이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겸 목사
하나로교회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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